2025. 1. 15. 23:58ㆍ문화노트/드라마 감상
대중매체는 불가피하게 장르의 규칙이나 트렌드를 따라야 하기 마련이다.
거기서 응용하고 반전은 만들어낼 수 있겠지만, 많은 자본이 투입되는 만큼 작가는 자신의 창작욕을 조금 접고 입증된 다수의 취향에 눈치를 봐야 한다.
하지만 요즘 한국 드라마의 수준은 절대 만만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드라마를 자주 보는 편이 아니지만 소수의, <오징어 게임>, <더 글로리>, <스카이캐슬> 같은 작품들은 정말 인상깊게 봤다.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실낱같은 계층의 동아줄을 타고 올라가기 위해 서로 아귀다툼하는 현대 한국사회를 반영하는 듯하다.
물론 일말의 도덕률을 지키는 주인공도 있지만, 그들조차 모든 것을 내건 처절한 투쟁을 하고 쓰러질 만 하면 예리한 반격을 마련해두고 있었다. 그리고 선악을 구분하기 힘든 입체적인 인물과 예상못한 반전이 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요즘 한국 드라마의 세계적인 위상은 그런 화면 밖으로 쏟아져나올 듯한 활력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대륙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있는 미국이나 유럽 같은 소비 강국의 사람들은 조막만한 나라에서 위아래도 막혀서 어디 도망가지도 못한 채 현실 오겜을 벌여야 하는 우리의 처절한 다이내믹함에 매력을 느낀다고.
그런 점에서 '옥씨부인전'은 주목할 만하면서도 아쉬운 점이 많았다.
'옥씨부인전'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 현대를 떠올리게 하는 계급갈등과 성소수자 차별을 소재로 내세운다.
이를 희소하게, 그것도 대부분 주변부로만 다뤄지던 조선시대의 변호인, 외지부라는 독특한 소재로 풀어내려는 시도도 좋았다.
유럽의 잘 알려진 옛 이야기를 한국의 고전소설에 접목시키기 까지, 과연 한류의 번영을 책임질 한국 콘텐츠진흥원에서 눈독들이고 지원할만한 기획이었다.
하지만 우선은 지나치게 극단적인 운과 불운, 선과 악에 기댄 서사가 아쉽게 다가왔다.
이 드라마의 등장 인물들은 거의 처음 등장할 때 눈빛부터 마치 이마에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이라고 써놓은 듯 선악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대로 선인이 힘을 쓰면 행운, 악인이 응징을 가하면 불운이 되어 구덕이의 운명을 정직하게 뒤바꾼다.
유럽과 한국의 옛 이야기를 '재해석'해야 하는데 이야기의 입체감마저 거기에 머무른 느낌이다.
더욱이 실제 역사보다 노비가 지나치게 천대받다가 다음 장면에서는 양반과 노비가 스스럼없이 지내는 것을 사람들이 그러려니 지켜보고, 그런 천민에 비해 주인공을 비롯한 여성들의 삶은 현대사회 못지않게 자유롭게 묘사되며, 한술 더 떠서 법정다툼(?)을 벌이는 청수현이라는 고을의 관아는 현대 한국보다 더 지엄하게 법치주의를 지켜서 아까는 사람도 아니니 죽이겠다던 동성애자의 진술을 받아들여 유력한 양반을 사형에 처하려 하는 등 모든 설정이 뒤죽박죽이다. 사극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인물들이 태반이라 이게 조선인지 현대인지 헷갈릴 때도 많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민감하고 무거운 주제의식과 배치 되는 가벼운 필치의 연출로 뭉뚱그리듯 넘어간다.
캐릭터가 시나리오에 종속된 도구가 되면 이야기는 힘이 죽게 마련이다.
'넌 착한 짓만 해야되' 라고 역할이 주어진 인물들이 독한 행동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고 마치 작가도 몰랐다는듯 이야기를 뒤집으며 암울한 상황을 헤쳐나갈 때 관객도 놀랄 만한 반전이 일어나고 살아있는 캐릭터가 완성된다.
물론 모든 드라마가 그렇게 극단을 달릴 필요는 없다.
'옥씨부인전'은 전형적인 인물들의 행동과 전개로, 신파와 권선징악으로 해피엔딩 까지 나름의 힐링을 전하는데 만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무거운 소재들을 선택할 때부터 그게 의도였을까?
'계급차별'에 '성소수자'에 '조선시대의 변호사'를 내세울 때부터?
게다가 소재들의 무게와 심각성으로 인해 옥태영 스스로 느끼듯 로맨스에 집중하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이제 '옥씨부인전'은 12부작 까지 방영돼서 예정된 16부작의 1/4 정도만 남아있다.
현재의 위기를 잘 봉합하고 로맨스를 잘 살린다면 평작 정도 평가를 받을 것이다.
가면 갈수록 위기를 얼렁뚱땅 넘기는 느낌이라 이마저도 불안하지만..
하지만 한편으로는, 혹시나 처음에 던졌던 주제들을 잘 회수해서 명작으로 남을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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