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원의 레미제라블, '문제아들'을 전면에 내세운 나름 용감한 기획

2025. 2. 11. 22:44문화노트/드라마 감상

클릭 시 출처 이동-ENA-

 

ENA와 백종원이 손잡고 내놓은 예능, <레미제라블>이 준결승, 결승이 벌어질 두 화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레미제라블'은 시청률 1%대, 넷플릭스 TOP10의 끝을 오르내리는 등 확실히 성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시청률 사정이 어려운 ENA의 예능 중에서는 그나마 선방한 편이고 좋든 싫든 여러가지 이슈(...)로 화제성은 비교적 챙기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특징은 일반인 중에서도 '문제아들'을 출연진으로 내세웠다는 점입니다. 흔히 범죄자나 잘못한 일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 '엄벌주의' 여론이 높은 한국에서,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주요 포인트로 삼은 것은 꽤나 실험적인 기획이라 할 수 있습니다.

ENA는 2022년에 개국(정확히는 재개국)한 신생 드라마·오락 채널로서 존재감을 키우려는 움직임을 보여왔고, 백종원 선생님은 '사업 실패를 딛고 자수성가한 친서민형 외식사업가'의 이미지를 구축해 왔습니다. 연초부터 빽햄논란백종원이 두 요소가 결합하면서 '레미제라블'이라는 도전적인 프로그램이 탄생하지 않았나 합니다.

 

'문제아들'을 전면에 내세운 프로그램이 한국 예능에서 성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과거 <소녀시대와 위험한 소년들>이나 <송포유> 같은 프로그램들이 비슷한 시도를 했지만, 구설수와 시청률 문제로 비슷한 프로가 이어지지 못하거나 심지어 조기종영으로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송포유'와의 본격적인 비교는 여기에서-
이런 스타일의 예능이 반드시 좋다고는 못하겠지만, 다양성 측면에서라도 응원하는 마음으로 간단히 리뷰를 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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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에는 백종원 뿐만 아니라 '돌아이' 윤남노, '철가방 요리사' 임태훈, '고기깡패' 데이비드 리 까지 <흑백요리사>에서도 주목받았던 셰프들이 대거 멘토로 참여했습니다. -출처: Netflix-

 

'흑백요리사'와의 비교

'흑백요리사'가 종영된 지 불과 두 달 만에 방영된 '레미제라블'은 같은 요리 경연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비교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백종원을 비롯한 대다수의 멘토들이 두 프로그램에서 모두 출연했으니까요.이런 '흑백' 출신 게스트분도 출연하고요!

 

'레미제라블'이 '흑백요리사'의 후광을 등에 업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프로그램 내에서도 장사 과정에서 멘토들의 경력을 활용하거나, 시크릿 심사의원의 악평에 대해 "(백종원에게) 흑백요리사의 복수를 한다"는 언급이 나오기도 했죠. 이렇게 성공적인 유사 포맷의 예능에 이어서 방영된 것은 어디까지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행운이 따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 또한 '흑백요리사'를 보지 않았다면 '레미제라블'을 시청했을지 의문이 드니까요.

 

하지만 이러한 후광 효과에도 불구하고, 재미의 측면에서는 '흑백요리사'를 따라가기 어려웠습니다. 오히려 '레미제라블'을 '흑백'에 이어서 보니 마치 어벤저스를 보고 난 후 우뢰매를 보는 듯한 느낌, UFC를 보다가 동네 주먹싸움을 보는 듯한 차이를 느끼게 했죠. '흑백요리사'에서는 셰프들이 혼자서 해내며 감탄을 자아냈던 요리 과정을, '레미제라블'에서는 네 명 이상이 붙어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초보니까 어쩔 수 없지만 요리 하나를 만드는데 2시간이 꼬박 걸리는 걸 보면, '흑백' 세미파이널에서 하나의 재료로 30분에 하나씩 6개의 요리를 그것도 코스 요리에 맛과 스토리텔링까지 갖춰 내던 어느 분이 떠오릅니다. 정말 그 분은 초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죠. 그러다보니 요리에 맞춰 극이 진행되는 속도감이나 음식의 플레이팅을 보거나 맛을 상상하는 감각적인 즐거움까지도 상대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흑백요리사'프로급 셰프들이 한계를 돌파하며 경쟁하는 프로그램이었다면, '레미제라블'요리 초보들이 바닥에서 시작해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는 재미 측면에서 큰 차이를 만들어냈습니다. '흑백요리사'에서는 셰프들이 혼자서도 해내던 것들을, '레미제라블'에서는 네 명이 붙어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장면이 빈번하게 일어났죠. 

 

하지만 더욱 흥미로운 점은 절박함에서도 '레미제라블' 출연진들이 '흑백요리사'의 셰프들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흑백요리사'의 셰프들이 보여줬던 요리에 대한 존경스러운 열정과 노력은 누구나 인상적이라고 생각할만 했습니다. 반면 '레미제라블'의 멘티들은 멘토들이 지속적으로 스토리텔링을 강조하며 조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출연자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이 종종 보였습니다. 요리를 하는 사람이면 당연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설명과 서사 전달이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백종원이 직접 지적하듯, 일부 멘티들은 한창 요리 미션을 고민해야할 시간에도 서로 장난을 치거나, 조리 가이드라인을 무시하고 심지어 주먹다짐까지 가는 기가막힌 태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현장에서의 판단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멘토의 조언을 따르지 않거나, 과거에 치킨집을 운영했다는 이유로 독단적인 결정을 내리는 모습은 시청자로서 답답함을 넘어 어이가 없게 했죠. 이런 태도를 보며, '흑백'의 팀전에서 본인들도 요리로 일가를 이뤘음에도 묵묵히 리더의 말을 따르던 셰프들에게 더욱 존경심이 들었습니다.

 

결국, 무엇이든 새롭게 가꾸는 것보다 이미 쌓아온 것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더 어렵고 대단하다는 점을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흑백요리사'의 셰프들이 보여준 일관된 각오와 노력, 번쩍이는 아이디어를 다시금 떠올리며, 그들의 성취가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죠. 그분들의 모습을 보면 '흑백'의 연출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다는 생각도 드는 반면, '레미제라블'은 특히 멘티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기 전에는 제작자들 고민이 참 많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행포르노?

'레미제라블'은 초반 참가자들의 절박한 사연을 전면에 내세워 '불행포르노'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의 모든 감정이 자유롭게 소재가 될 수 있어야 하고, 문제는 누군가의 '불행'을 다루는 자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프로는 멘티들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췄습니다.

 

우선 '레미제라블'은 출연자들의 사연과 불행을 다루는데 대해 감정과잉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방영 내내 출연자의 개인적인 사연을 반복재생하지 않았고, 그나마 이를 나타내던 '박스에 버려진 나', '이글스 방출 투수' 같은 닉네임들도 그들의 과거와 함께 미숙했던 요리 실력이 사라지고 일취월장하면서 잘 보이지 않게 되었죠. 사실 초반부 패자부활전에서 알콜중독자분의 아버지와의 눈물어린 오랜만의 만남이 등장해서 '이런 식으로 가려나...'하고 불안했지만 그게 끝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점은 출연자들이 단순히 '소모품'으로 소비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레미제라블'은 그들의 사연을 쓰고 탈락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들 한명 한명에게 스스로도 장사의, 삶의 밑천이 될 수 있는 요리를 가르치는데 집중했습니다.  

물론 이 프로는 한 명의 우승자에게만 가게를 차려주는 방식이지만, 과정 중에도 재료비와 장사 밑천을 통 크게 지원했죠. 그리고 3-4화에 첫 탈락자들에 대해 백종원이 예정에 없던 패자부활전을 제안할 때도 이를 느꼈는데, 요리 맛만 보고 탈락할 뻔 했던 그들 각자에게 멘토를 붙여 필살기가 될 요리를 배우게 했던 것이죠. 이건 그들에게 다음 스테이지로 갈 수 있는 기회 뿐만 아니라, 모든 참가자들에게 멘토에게 요리에 대해 배울 기회를 준다는 의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종원씨가 직접 언급했듯이, 대부분의 출연자들이 배운 요리는 조금만 더 다듬으면 실제 음식점에서 내놓을 만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죠. 

이 프로그램이 모든 출연자들에게 '물고기'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낚싯대'는 건네준다는 원칙을 지켰습니다. 따라서 '레미제라블'은 단순한 동정심을 유발하는 '불행포르노'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프로그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범죄미화?

이 프로그램이 '범죄미화'라는 논란도 있었습니다. ENA에서도 이런 분위기를 미리 염두에 뒀다는 듯 "방송을 통해 확인해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특히 과거 소년범 경력이 있는 일명 '9호 처분 소년 절도범'에 대해 비판이 집중되었죠.

하지만 '범죄미화'란 엄밀하게 말하면 범죄 행위를 낭만적으로 포장할 때를 의미합니다. 요즘에도 잊을만하면 빈번하게 나오는 한국형 조폭물들에서 폭력마저도 낭만적인 일로 그려지는 것처럼 말이죠. 이에 비해 '레미제라블'은 해당 출연자의 고백을 담담히 전달할 뿐이며, 변명보다는 자책과 반성의 태도를 부각합니다.

 

시청자들의 비판을 살펴보면, '너희가 범죄자들에게 당하고도 그런 프로를 만들거냐?' '왜 범죄자의 이익을 고려할 시간에 피해자를 챙겨라', '범죄자가 방송에 노출되면서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를 유발하는 것은 아닌가' 등의 우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의견은 공감할 만한 부분도 있지만 너무 감정적이기도 합니다. 반면 '레미제라블'은 과거 실패 사례인 송포유 같은 프로그램과 달리, 출연자들의 과거에 대해 지나친 공감의 자세를 취하지 않고 동정이나 합리화를 시도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레미제라블'이 취하는 태도는 상당히 합리적으로 '사회적 기회 제공'이라는 주제를 견지합니다.

'부모나 가정의 보호 없이 살아온 사람들에게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거죠. 그들이 가난이나 알코올, 도박 중독 등에 빠진 것은 노력을 안해서가 아니라 기회와 믿음을 얻지 못해서 그런 것이고 이런 생각은 방송에서 기회가 주어졌을 때 성장하는 멘티들의 모습으로 더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백종원이 말하듯 그런 모습을 보고 또한 시청자들도 응원을 받은 기분이 들고요.

이런 의도는 프로그램 제목을 <레미제라블>로 정한 데서도 나타납니다. 범죄자였지만 자신이 범죄를 저지른 신부님의 용서로 인해 개심하여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고 프랑스 혁명에서도 한 역할을 하게 되는 장발장을 보면 사람들에게 믿음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회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메세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죠.

 


 

마치며: '공론의 장'으로 평가받기를

'레미제라블'은 꽤나 실험적인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게다가 '흑백요리사'의 후광을 등에 업은 만큼 비교될 수밖에 없었고, 재미와 출연자들의 면면에서도 다소 아쉬운 부분도 있었죠. 하지만 이 프로그램이 던진 화두는 분명 의미가 있습니다.

 

'문제아들'도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 사회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예능의 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개인적으로 이 프로그램이 남은 시간 더 많은 관심을 받아 앞으로도 이런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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