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챠에서 꼭 봐야 할 다큐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여기 있다》, 현대예술의 현주소는 그녀의 행위에 있다

2026. 2. 19. 23:59주목한 영화들

클릭 시 출처 이동

 

친구들과 다큐멘터리 영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여기 있다》(Marina Abramović: The Artist Is Present)를 함께 보며, 1시간 40분 내내 이 예술가의 철저한 외모 관리와 짙은 상업적 면모를 두고 성토하던 우리는, 유명한 2010년의 회고전 장면을 보면서 기어이 "대체 얼마를 주면 3개월 동안 저기 가만히 앉아있을 수 있을까?"라며 노동의 견적을 내는 논쟁을 벌이는 데 이르렀습니다.

 

행위의 의미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있었으니 저는 아무래도 예술가가 되기엔 한참 먼 것 같아요.. 하지만 이 다큐는 그와 함께 ‘그렇다면 예술이란 대체 무엇일까?’라는 물음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01
마르셀 뒤샹의 <샘>(Fountain, 1917)과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리듬 0>(Rhythm 0, 1974)

 

들어가며: 뒤샹의 레디메이드에서 마리나의 신체로

마르셀 뒤샹이 20세기 초, 대량생산된 남성용 소변기를 '선택'하는 것만으로 작품의 지위로 승격시킨 이후, 현대예술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궤적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그 이면에 담긴 '개념(Concept)'을 읽어내는 행위로 변화한 것이지요. 작가가 대상에 부여한 의도를 생각하고 감상자가 자신의 삶을 투영하며 깨달음을 얻는 과정 전체가 현대미술의 본질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행위예술은 이러한 현대예술에서 하나의 가장 극단적인 진화 형태입니다. 뒤샹이 <샘>에서 의뭉스럽게도 주변에서 흔히 보던 공산품인 소변기를 무대에 올렸다면, 그녀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평소에는 온전히 의식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몸'을 예술 매체로 변모시킨 것입니다.

 


 

012
예술적인 이별 퍼포먼스 <연인, 만리장성 걷기>(The Lovers: The Great Wall Walk, 1988), 울라이와 함께 연작을 발표하던 시절의 <시간에서의 관계>(Relation in Time, 1977)와 죽음과 하나되는 퍼포먼스 <거울 청소>(Cleaning the Mirror, 1995)

 

사회적 가면을 벗기고 벌거벗은 삶을 마주하다

 

마리나는 1974년 <리듬 0>에서 여섯 시간 동안 아무런 저항 없이 관객이 자신의 몸에 가하는 모든 행위를 받아들이는가 하면, 1988년 작 <연인, 만리장성 걷기>에서는 당시 남편이던 울라이와의 12년간의 관계를 마감하며 각자 만리장성 끝에서 출발해 90일간 총 4,000km이나 걸어 중간에서 만나 작별 인사를 나누지요. 이처럼 극심한 체력 소모와 고통, 고독, 탈진을 감내하는 방식 때문에 그녀의 공연은 인고예술(Enduarance Art)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마리나는 왜 스스로의 몸에 고통을 가하는 이토록 극단적인 작업을 계속해 온 것일까요? 전시할 오브제가 필요했다면 몸을 가만히 두거나 평화로운 행위만으로도 충분할텐데 말이에요. (철멍뭉님의 <리듬 0>에 관한 영상)

 

그런데 그녀의 작업이 탐구하는 남녀의 신체성, 고통과 인내, 그리고 타인과 몸으로 서로 부딪치고 상처 입히는 모든 방식들은 사실 우리가 일상과 노동, 관계 속에서 겪는 삶의 질감과 아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스튜디오나 미술관의 무대에 전시되고('행위'되고), 2010년의 퍼포먼스 <예술가가 여기 있다>처럼 관객이 몸소 참여하는 순간 우리의 몸과 삶은 일상의 관성에서 잠시 벗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철저한 침묵 속에서 서로의 눈동자를 마주 보는, 일상에서는 좀처럼 겪기 힘든 일을 통해, 사회적 가면이 벗겨지고, 비로소 벌거벗은 우리의 '삶' 자체가 거울 속 내 모습처럼 마주 보이게 되는 것이지요.

 


 

처음보는 누군가와 아무 말 없이 마주보게 된다면, <예술가가 여기 있다>(The Artist is Present, 2010)

 

70년대의 급진성, 그리고 현대 예술의 상업적 아이러니

 

사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여기 있다》에서 벌거벗은 맨몸보다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은, 마리나의 행위예술이 지녔던 초기 급진성이 자본과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변모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1970년대, 갤러리의 상업주의에 반발하며 결코 팔아치울 수 없는 '행위'를 선택하고 관객들에게 무슨 짓이든 가하라며 자신의 몸을 완전히 내맡겼던 <리듬 0> 시절과는 달라 보입니다.

 

이제 그녀의 행위 중 주요 순간들은 계산적으로 작품화되어 고가에 판매되고, 퍼포먼스 현장은 미술관 경호원들에 의해 철저히 통제됩니다.  2010년에 자신의 전 연인 울라이와 수십 년 만에 극적으로 재회했다고 전 세계적으로 바이럴 된 그 감동적인 만남조차, 사실은 다큐에서 드러나듯 지속적인 사전 접촉 끝에 조율된 무대였습니다 — 퍼포먼스에서 공감을 나누는 행위는 진심이었겠지만 말이지요.

 


 

2023년 영국 왕립예술원 메인 갤러리에서 여성 예술가로서는 최초로 열린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개인전 전경. 최근에는 여러 나라 미술관에서도 그녀의 작업을 돌아보는 회고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클릭 시 출처 페이지로 이동)

 

마치며, 스크린 밖으로 이어진 퍼포먼스의 힘

 

그럼에도 제가 이러한 변화에 아이러니를 느꼈을지언정, 영화 전체를 부정적이거나 냉소적으로만 보았던 것은 아닙니다. 마리나는 흠결 없는 성녀나 세속을 초월한 구도자가 아니며, 다큐멘터리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냅니다. 화려한 쇼핑에서 옷을 입어 보며 만족감을 느끼는 장면이나 공연이 끝난 뒤 몰려오는 육체적 고통을 숨기지 못하는 순간들에서는, 예술가의 무대 뒤편에 자리한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 드러납니다.

 

결국 이 작품은 순수함과 상업성이라는 납작한 이분법을 넘어,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를 중심에 두고 거대한 자본과 치밀한 기획 속에서 현대 행위 예술이란 종합적으로 무엇인지를 탐구합니다. 현대 예술이 하나의 스펙터클로 어떻게 소비되고, 또 그 정교하게 설계된 무대가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쥐고 흔들어 삶의 결을 바꾸어 놓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 주지요. 스크린 밖에서 영화를 보고 나서도 장난스럽게 노동의 ‘견적’을 내던 우리가 잠시나마 진지한 얼굴로 예술과 우리 삶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갔다면,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는 이번에도 완벽하게 성공한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