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2. 10. 22:39ㆍ주목한 영화들

현실의 물리 법칙에 얽매이지 않는 애니메이션만의 자유로운 표현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개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을 때 알게 된다.
가장 작고 슬퍼 보였던 존재의 스러져가는 생이 사실은 행복으로 충만한 삶이었다는 걸.

프랑스·루마니아 합작 애니메이션 영화 《환상의 마로나》(Marona’s Fantastic Tale)는 한 마리 강아지의 짧은 생을 통해 인간과 동물, 예술과 노동, 상실과 행복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도로 위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마로나의 몸을 비추는 장면으로 시작해, 그의 기억에 따라 가난한 곡예사 마놀, 건설 노동자 이스트반, 어린 소녀 솔랑주와 싱글맘의 곁을 옮겨 다니며 함께했던 시간을 “영화처럼 스쳐가는” 플래시백으로 따라가게 되죠.
이 작품은 비록 러닝타임은 90분 남짓으로 짧은 편이지만, 화면에 펼쳐지는 세계는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각기 다른 색채와 선, 기하학적 공간과 유동적인 신체가 뒤섞인 이 애니메이션은 요즘 많이 개봉하는 3D 애니와는 다른, 일러스트와 실험 애니메이션의 미학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다소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 번 마로나의 눈높이에 마음을 맞추고 나면 그 안에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감각과 관계의 풍경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글에서는 단순한 “견생 회고담”을 넘어, 《환상의 마로나》가 어떻게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을 빌어 비인간의 감각과 경험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특히 개의 후각과 정서, 인간보다 낮은 시선에서 바라본 사회의 풍경이 어떤 방식으로 화면에 번역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윤리와 상상력이 요청되는지를 찬찬히 짚어보고자 합니다.


개의 후각으로 다시 그린 세계
마로나가 보는, 혹은 그보다 '맡는' 세계는 인간의 시각 중심적인 세계와는 많이 다릅니다. 안카 다미안 감독은 인터뷰에서 애니메이션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예술”이라고 설명하면서, 개의 감각, 특히 후각과 감정의 인상을 이미지로 번역해내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마로나의 세계의 중심이 되는 것은 물론 그녀의 주인들입니다. 그래서 브레흐트 에번스가 디자인한 캐릭터들의 외모와 성격, 상황에 따라 마로나가 보는 세계의 모습도 변화하죠. 첫 번째 주인, 곡예사 마놀의 세계는 붉은색과 곡선, 허공으로 끝없이 뻗어나가는 몸으로 표현됩니다. 몸의 선과 무늬 자체가 감정의 파동을 드러내는 캐릭터로, 마로나가 느끼는 열정·자유·동경의 온도를 시각 언어로 치환한 결과처럼 보입니다.
반대로 건설 노동자 이스트반의 건설 현장은 직각과 평면, 청사진 같은 기하학적 공간으로 그려집니다. 사람과 건물, 크레인이 하나의 설계도 안으로 편입된 것 같은 이 세계는, 개의 감각에서 포착된 규칙성과 긴장, 구조의 압박감을 추상화한 그림처럼 보입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영화가 단순히 카메라 높이를 낮춰 “개의 눈높이”를 흉내 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후각으로 기억을 더듬는 개의 방식을 따라, 마로나가 솔랑주의 버스를 쫓아 달릴 때 과거의 장소들이 냄새와 함께 번쩍이며 스쳐 지나가죠. 엄마와 형제들, 마놀, 이스트반의 흔적이 한 번씩 화면을 채우는 이 연속 몽타주는, 개에게 ‘장소는 곧 냄새의 결’이라는 사실을 환상적인 이미지로 재구성하는 순간으로 보입니다.
동물 재현 연구에서는, 인간이 동물을 그릴 때 두 가지 유혹을 동시에 경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동물을 온전히 인간처럼 만들어버리는 인간화(anthropomorphism)이고, 다른 하나는 감정을 제거한 채 데이터처럼 취급하는 객체화(objectification)입니다. ¹ ² 인간은 어디까지나 한정된 자신들의 감각과 경험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이 두 표현법은 제삼자로서 동물의 세계를 그리기 위해 어느 정도는 필연적인 방식들입니다. 하지만 '공감'이라는 명목 하에 동물의 내면을 자의적으로 추측하거나 아예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만들어버린다면 그것은 더 이상 동물이 아니게 될 것이고, 그렇다고 동물을 생각도 감정도 없는 타자나 사물처럼 대한다면 그들을 이해하고 공존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게 되겠죠. 이들은 동물뿐만 아니라 타인과 타자에 대해 깊이 있게 쓰고 그리고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난제입니다.
《환상의 마로나》가 흥미로운 이유는 이 두 극단을 동시에 피해 가려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마로나는 분명 인간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말하지만,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만큼은 끝까지 개의 감각에 기대어 있습니다. 현실의 개가 정말로 이런 색과 형태로 세상을 볼 리는 없겠지만, 이 영화는 바로 그 “상상된 감각”을 통해 비인간 감각을 이해해 보려는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품입니다. 그런 점에서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는 동물의 시점과 세계를 상상해서 그려내는데 더할 나위 없는 매체로 보입니다.

비고정적인 몸: 신체가 감정으로 변할 때
마놀의 몸은 늘어진 선, 분리된 팔다리, 공중에 흩어지는 조각으로 표현됩니다. 이는 곡예사의 유연함을 넘어, 마로나에게 비치는 사랑하는 존재의 향기와 에너지를 형상화한 것에 가깝습니다.
애니메이션에서 신체는 현실처럼 고정된 형태를 유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화감독이자 이론가, 특히 초기 애니메이션 이론가이기도 했던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은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형식이 가지는 형태 변형 능력을 “플라스마틱함(plasmaticness)”이라고 불렀습니다. 플라스마는 물리학에서 고체·액체·기체가 아닌 제4의 물질 상태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고대 그리스어 plásma(형태를 빚어낸 것)에서 나와 "정해진 형태를 거부하고, 어떤 형태로도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 거죠. ³ ⁴ ⁵ 이처럼, 애니메이션에서 형체는 감정의 흐름에 따라서도 마음껏 변형될 수 있습니다. 「환상의 마로나」 속 인물들은 바로 그런 플라스마틱한 존재들입니다.


- 마놀의 몸이 늘어나고 말려 들어가는 장면은, 마로나가 느끼는 흥분과 황홀, 동시에 불안한 열망을 한 번에 담아냅니다.
- 이스트반의 거대한 몸과 작은 얼굴은, 다정하지만 생계와 구조 속에 눌려 있는 이민 노동자의 정체성을 은유하면서, 마로나의 감각에서는 “커다란 보호막이자 거대한 벽” 같은 인간으로 읽힙니다.
이 부분이 동물의 몸을 '객체화'된 관찰 대상이 아니라 주체의 표현 수단으로 보는 순간들입니다. 이 영화의 인물 디자인은, 인간의 몸을 고정된 형태에서 해방시키는 동시에 비인간(개)에게도 비슷한 수준의 표현력을 부여합니다. 마로나의 작은 몸에서 뻗어 나오는 따스한 붉은 선, 꼬리 끝에서 불꽃이나 구름처럼 터져 나오는 요소들은 “지금 이 개가 무엇을 느끼는지”를 직접 그림으로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신체는 더 이상 ‘객체’가 아니라, 감정을 자아내는 주체가 됩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개의 시선에서 본다는' 표현법을 결코 개나 동물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의 눈높이에서 본 인간 사회: 가장 낮은 시선의 윤리
영화는 여러 번 마로나의 눈높이에 카메라를 맞춥니다. 그런데 이건 단순한 연출 기법이라기보다 일종의 윤리적 시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거리의 곡예사, 이민 노동자, 싱글맘과 소녀 솔랑주까지, 모두가 사회 구조에서 ‘주류’라고 부르기 어려운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마놀은 재능은 있지만 가난하고, 제도 밖에서 살아가는 예술가입니다. 이스트반은 설계도 속 자리에 맞춰진 노동자이자, 아픈 어머니와 요구 많은 아내 사이에서 삶을 지탱할 곳이 필요한 중년 남성입니다. 솔랑주의 엄마는 돌봄과 생계 사이에서 늘 지쳐 있는 싱글맘이죠.
이들은 결국 계속해서 함께하지 못하지만, 마로나는 사람들을 결코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별의 순간마다 마로나는 인간의 불완전함과 불행을 “냄새”로 먼저 알아차리고, 그들이 자신을 버릴 수밖에 없는 사정을 조용히 받아들입니다. 마놀에게 “가난하다니, 당신과 함께라면 나는 세상에서 제일 부자야”라고 말하며 우주의 행성들 사이를 뛰어다니는 장면은, 개의 시선이 인간의 경제적 결핍을 어떻게 전혀 다른 가치로 변환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순간입니다.
비인간을 통해 인간 사회를 되비추는 이런 관점은, “동물-거울(animal as mirror)” 개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감독 안카 다미안 역시 “마로나는 결국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언급하면서,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능력이 인간 관객에게 하나의 질문으로 남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합니다. 비인간의 감각을 상상해 본다는 것은, 동물의 입장에서 공감하는 일인 동시에 인간이 당연하게 여겨 온 가치와 욕망을 낯설게 바라보는 일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실험실, 비인간 감각을 상상해 본다는 것
실제 개의 후각 세계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중요한 것은, 비인간 감각을 상상할 수 있는 형식을 찾는 일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다미안 감독은 현실과 다른 시간·공간·형태가 허용되는 애니메이션이 이런 상상 실험에 가장 잘 맞는 매체라고 말합니다.
동물 다큐멘터리에서 “그 동물의 입장이 되어 본다”는 말은 자주 쓰이지만, 카메라는 종종 인간 관찰자의 시선을 끝까지 내려놓지 못한 채 동물을 대상화합니다. 한편, 《환상의 마로나》처럼 적극적으로 상상력을 동원하는 애니메이션은 “정확한 재현”보다는, 비인간 주체성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그들에 대한 접근법으로 제안합니다. 동물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연구들에서도, 때로는 예술적·시적 개입이야말로 비인간 주체성을 상상해 보는 데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강조하고는 하는 것처럼 말이죠.
다시 말해서 마로나의 세계는 사실적이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오히려 “개라면 어떻게 느꼈을까?”라는 질문을 더 자유롭게 던질 수 있습니다. 비틀린 원근, 과장된 색, 불가능한 몸의 변형, 냄새가 시각 궤적으로 남는 장면들은 모두 “인간이 모르는 세계도 있을지 모른다”는 감각을 깨우는 장치입니다. 그 순간 애니메이션은 비인간 존재의 감각과 경험을 대신 말해주는 도구가 아니라, 함께 상상해 보는 공동의 실험실이 됩니다.

한 강아지가 들려준 인생 이야기, 그리고 그 너머
영화의 시작과 끝은 도로 위에 쓰러져 있는 마로나의 몸입니다. 처음에는 너무나 비극적인 장면처럼 보이지만, 마로나의 삶 전체를 함께 따라가고 나면 이 이미지는 전혀 다른 정조를 띠게 됩니다.
버스에서 내린 솔랑주를 구하기 위해 도로로 뛰어든 순간까지, 마로나는 “그들과 함께라면 나는 세상에서 제일 부자였다”라고 믿습니다. 행복은 이 작은 개에게서 소유가 아니라 관계이며,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함께 한 순간의 밀도”입니다. 그 지점에서 관객이 경험하는 것도, 단지 한 반려견의 헌신을 넘어서, 우리가 자주 잊고 지내던 감각—지금 이 순간, 눈을 마주치고 있는 존재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충만해지는 감각에 가깝습니다.
‘예술을 통한 비인간 감각의 재구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환상의 마로나》는 개가 인간처럼 말하도록 만드는 영화라기보다, 잠시나마 인간이 개의 감각으로 세계를 다시 느껴보도록 초대하는 애니메이션에 가깝습니다. 후각·감정·관계에 기반한 세계를 색과 선, 움직임으로 번역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나 아닌 존재의 삶”을 상상해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상상이 끝난 자리에는, 마로나가 평생 실천해 온 아주 단순한 진실—지금 곁에 있는 존재를 더 사랑해야 한다는 진실—이 조용하게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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