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18. 23:28ㆍ주목한 영화들

이반: 사인해 주세요
(선글라스를 써서 애니의 시선을 차단한 채 이혼소장을 앞에 두고)
영화 <아노라>는 미국에서는 올해 10월, 한국에서는 11월에 개봉된 작품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2018)로 한국에서도 상당한 팬을 거느린 션 베이커 감독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그가 항상 다뤄온 성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파격적인 소재에 <원스 어폰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 등에 출연한 마이키 매디슨의 매력적인 연기로 화제를 모았다.
'아노라'는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귀여운 여자>(1990)가 떠오르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떠오르는 사랑 이야기지만, 현대 사회의 냉정한 자본주의 구조 속의 복잡한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나 역시 기대한 만큼 인상적으로 본 이 영화에 대해 줄거리부터 알아보려 한다.

줄거리
아노라 "아니" 미케예바는 뉴욕 브루클린에 사는 23살의 러시아계 미국인 스트리퍼이다.
그녀는 여느 때와 같이 성노동자 일을 하다 이반 "바냐" 자하로프라는 남자와 관계를 맺게 되고, 점점 사이가 가까워지며 그가 상당한 부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21살에 불과한 그의 재력에 놀란 아니는 그가 "앱을 만드냐"라고 물어봤지만 바냐는 자신이 러시아 재벌 니콜라이 자하로프의 아들이라고 답한다.
바냐는 공부하러 미국에 왔지만, 브루클린에 있는 부모님 소유의 맨션에서 파티 열고 게임하며 노닥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는 바냐의 마음에 들어 여러 번 성관계 거래를 하고, 일주일 동안 파트너가 되어 달라며 15,000달러에 계약을 맺기도 한다.
이때 장난스러운 흥정을 하던 중 바냐가 '3만 달러'라도 오케이 했을 것이라 하자 아니는 '만 달러'라도 괜찮았을 것이라 한다.
그들의 돈과 사랑, 쾌락이 뒤얽힌 그들의 속마음은 서로에게도 관객들에게도 헷갈린다.
아마 그들 자신도 확실치 않았을 것이다.
일주일 간 즐기던 도중 바냐와 아니는 친구들과 함께 라스베이거스로 날아갔는데, 거기서 바냐는 아니에게 결혼 제안을 한다.
이 역시 어디까지가 사랑인지는 헷갈리지만, 확실한 건 바냐는 계속 미국에 머무르고 싶고 그래서 아니 와의 결혼으로 영주권인 그린카드를 받으려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로 돌아와서 아버지 밑에서 일 하라는 가족들의 성화가 싫어서.
아니는 의심스러워하지만, 바냐는 진심이라고 우기고, 결국 둘은 도피 중인 것처럼 라스베가스의 조그만 웨딩채플에서 결혼을 해치운다.

브루클린으로 돌아온 아니는 스트립 클럽 직장에 와서 동료들의 축복과 한 라이벌 스트리퍼의 "2주일도 안 돼서 돌아올 것"이라는 저주 속에 짐을 챙겨 나와 일을 그만두고 바냐의 저택으로 이사를 간다.
하지만 결혼 소식이 러시아에 퍼지자, 바냐의 어머니 갈리나는 미국에 사는 대부 토로스에게 자신이 미국에 올테니 그 사이에 바냐 부부를 찾아서 결혼을 무효화하라고 명령한다.
토로스는 먼저 부하인 가르닉이랑 이고르를 바냐의 저택으로 보낸다.
바냐는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는 아니를 두고 도망가고, 여러 모로 화가 난 아니는 가르닉과 이고르와 몸싸움을 해서 다치게 하고 가구도 부수지만, 결국 비참하게 전화선으로 묶이고 재갈을 물게 된다.
이후 토로스가 도착해서 아니한테 바냐가 미숙하다고 설교하고, 결혼반지를 빼앗고, 결혼 무효를 받아들이면 만 달러 주겠다고 한다.
아니는 자기랑 바냐가 사랑한다고 우기지만, 우선은 바냐와 결혼에 관해 논의를 해야하므로 토로스가 바냐를 찾는 걸 돕기로 한다.

아니, 토로스, 가르닉, 이고르는 함께 도망간 바냐를 찾으러 브루클린을 돌아다니며 밤을 꼬박 샌다.
그러다 결국 아니는 취한 바냐가 자신의 전 직장에서 일부러 그에게 접근한 라이벌 스트리퍼와 관계를 맺으려 하는 것을 발견한다.
일행은 인사불성인 바냐를 끌고 나와 밤새 법원 밖에서 기다렸다가 다음날 재판에 참석하지만, 그들이 라스베가스가 있는 네바다에서 결혼했다는 이유로 판결이 기각된다.
그들 일행이 바냐를 찾아다니는 것은 영화상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데 좌충우돌이 재밌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느 관점에선 별 의미없고 지루한 광경이기도 하다. 감독은 그들의 생고생과 술이나 퍼마시고 (결혼 했다는 전제 하에)부정을 저지르는 바냐를 교차해서 보여주며 그가 몰지각한 위인이며 그럼에도 부모의 재산으로 얼마나 위세를 부릴 수 있는지 보여주려 한 것 같다.
그리고 이는 한편으로는 계속 묵묵히 아니의 곁을 지키는 이고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아니에게 말도 걸어보고 그녀가 화를 내자 조용히도 있어보고 그래도 추울까봐 스카프도 건내본다. '아노라'를 다시 보면 영화 상에 은근히 아니의 곁에는 바냐보다도 이고르가 있는 적이 더 많다. 그런 그의 행동에 관해서는 감상 부분에서 더 얘기하기로 하자.
이후 바냐의 어머니 갈리나가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도착한다.
아니는 자신이 싫어하던 러시아어와 '아노라'라는 이름으로 자기 소개를 하지만 갈리나는 아니를 무시한다.
갈리나는 모두에게 혼인 무효 재판을 위해 라스베가스에 가기 위해 비행기에 타라고 명령한다.
바냐는 어머니의 말에 군소리 없이 따르며 아니에게 결혼은 안 된다고 차갑게 말하고 아니는 끝까지 저항하지만 갈리나의 협박에 비행기에 타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맨 뒤에 있던 이고르가 오묘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
(갈리나의 명령대로 라스베가스행 자가용 비행기에 가는 도중 아니가 계속 얘기좀 하자고 다그치자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바냐: 무슨 말을 듣고 싶은건데?
아니: ...(말 문이 막힘)
바냐: 지금 젠장할 비행기를 타고 젠장할 베가스로 날아가야 해. 알겠어? 알겠냐고?
아니: 지금 우리 이혼하는 거야?
바냐: 물론이지! 너 바보야?
(어서 타라는 갈리나의 재촉)
바냐: (알았어요!)그리고 고마워. 내 마지막 미국 여행을 즐겁게 해줘서.

그들이 이혼 서류에 싸인하고 나서 별안간 이고르가 바냐에게 아니한테 사과하라고 제안하지만 갈리나는 아들이 누구한테도 사과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긴다. 이에 아니는 갈리나에게 "네 아들이 니가 싫어서 미국에 와서 나와 결혼한 것이다"라고 모욕을 하고 떠나고 이에 함께온 남편 니콜라이는 히스테리컬하게 웃는다.
이고르와 니콜라이는 마치 이 상황에 대해 무력함과 어처구니 없음을 동시에 느끼는 관객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고르는 명령을 받고 아니와 함께 브루클린으로 와서 짐 챙겨준다.
그 와중에 둘은 자하로프가의 저택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다. 이고르는 조용히 대화를 하고 싶어하지만 아니는 부아가 나 있고 이고르가 자기를 폭행했으며 둘만 있었으면 강간했을 거라고 쏘아붙인다(이고르는 부인하지만).
아침에 이고르는 아니한테 토로스가 약속한 돈을 주고 집에 데려다준다.
그리고 차 안에서 아니에게 이전에 명령을 받고 빼앗았던 결혼반지를 호의의 표시로 돌려준다.
아니도 이고르에게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그와 관계를 시작하지만 이고르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키스하려 하자 갑자기 그를 때리며 잠시 저항한다.
이는 조금 갑작스럽고 이 영화에서 가장 미묘하고 감정의 깊이가 상당한 장면 중 하나이다.
아마 이고르가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자 아니는 이전에 그에 의해 속박당했던 것이 생각나 두려움과 야속함이 떠올랐을 것이고, 그와 함께 그의 측은해하는, 그녀의 눈동자 속의 슬픔과 창피함과 무력함, 좌절을 들여다 보는 듯한 눈빛을 거부한 것이기도 하는 듯 하다.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아니에게는 그런 눈빛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반감도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해주고 배려해주는 사람에게는 오래가지 않는 법이다.
결국 무너져서 이고르 품에 안겨 울어.

주제와 메세지
'아노라' 주제의 사랑의 다양한 형태와 복잡함, 그리고 그 가운데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보인다.
처음에 바냐는 아니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돈에 이끌린 아니는 어떻고? 돈 앞에서 사랑이란, 사람의 진심이란 얼마나 통하고 지켜질 수 있는 것일까? 한편 모든 아수라장을 지켜봐 온 이고르는 아니의 어떤 점에 끌린 걸까? 그들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혹은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이고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적어도 혼인신고가 사랑을 지켜주는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돈과 외적 조건에 의해 맺어진 아니와 바냐의 약속은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영화 말미의 메세지는 서로의 바닥까지 보고도 이해하고 곁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하는듯 하다.
이고르는 부자도 아니고 조금은 무서워 보이는 인상이지만 주어진 명령을 잘 이행하는 성실하고 듬직한 청년으로 보인다.
그는 아니와 몸싸움도 벌이고 집에 둘만 남아있을 때도 있었으며 그 사이에 아니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독은 이고르가 그에게 성적으로 끌린다는 표현을 극도로 자제하고, 계속적으로 아니를 측은해 하는듯, 혹은 감정을 제대로 알 수 없는 미묘함을 고수한다.
아니도 그런 미묘함을 느꼈는지 둘만 남았을 때 "왜 날 강간하지 않았어?"라고 관객 입장에서 조금 기가 막힌 말을 하며 화를 낸다. 이고르가 이혼 현장에서 "바냐가 그녀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을 때 부터였을까? 아니는 이고르에게 알듯말듯한 호감을 느끼면서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 강제력의 일부로서 화도 나는 한편 목석같이 보이는 그가 자신을 매력적으로 느끼지 않는 것인지 생각하며 토라져도 보인다.
하지만 철없고 감정과 자존심이 앞서는 아니에 비해 이고르의 태도는 일관적이다.
영화 내내 명령 때문이든 뭐든 묵묵히 아니의 금방이라도 무너질듯 한 그녀의 곁을 지켜준다.
그가 아니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바냐의 태도와 가장 다른 점은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가 빈털터리라는 점은 왈가닥인 성격과 함께 그가 곁에서 지켜봐왔고, 앞서 말했듯 감독은 그가 그녀에게 성적으로 매력을 느낀다는 표현도 최대한 자제해왔다. 먼저 관계를 맺고자 했던 것도 아니였고.
마치며
결국 감독 션 베이컨은 과거의 신분제와 같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 복잡하고 어려운 사회구조 내에서, 그리고 그가 전작 <탠저린>과 <플로리다 프로젝트> 등에서 꾸준히 다뤄온 성노동자에 대한 차별적 문화 속에서도 사랑의 본질은 그리 어렵지도 변하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듯하다.
사랑은 분명히 사회, 경제적 요인에 영향을 받지만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을 지켜주는 누군가가 사랑이라고.
<귀여운 여자>는 90년대 가장 성공한 로맨스 영화 중 하나이고 미국 한국 할 것 없이 수많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게 만든 신데렐라 스토리의 원조이다.
이 영화는 각각 성공한 사업가와 콜걸인 주인공들의 사회적 신분 격차를 뛰어넘은 사랑이 나오며 작중 일주일 간 계약 연예를 한다는 점에서도 '아노라'와 비슷하지만, (훨씬 수위가 약하며)결국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사랑에 빠진다는 결말이 가장 다르다.
하지만 '귀여운 여자'의 원래 각본가는 실제 성노동자들의 잡담에서 착상을 얻어 시나리오를 집필했고, 원래는 남자가 약속한 계약금을 쥐어준 채 떠나버리고 여자는 이를 홧김에 던졌다가 다시 주어 모으며 둘의 관계가 끝났다고 한다.
두 영화 모두 각각의 장점이 있는 좋은 영화이지만, '아노라'가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런 현실의 냉혹함을 그대로 담았을 뿐만 아니라 감정선 역시 굉장히 리얼했기 때문이다. 아니가 겪는 기쁨과 갈등, 수치심과 막연한 기대는 관객들이 충분히 공감하고 스스로의 삶과 사랑에 대해 곱씹게 해주는 부분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아노라'는 화려한 비주얼과 음악과 함께 현대의 사회와 사람들의 삶을 깊이 반영해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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