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2. 20. 22:46ㆍ주목한 영화들
부모의 이혼으로 떨어져 사는 형제, 기적이 일어난다는 믿음 하나로 떠난 여행이 우리 삶의 마법이 되다.
들어가며: 부모의 이혼, 그리고 기적을 찾아 나선 아이들
마주 달리는 두 대의 기차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해서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어떨까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진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I Wish, 2011)》은 부모의 이혼으로 가고시마와 후쿠오카에 각각 떨어져 살게 된 초등학생 형제, 코이치와 류노스케의 아주 특별한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어느 날 큐슈 신칸센이 개통된다는 소식을 들은 형 코이치는, 새로 개통하는 기차와 기존의 기차가 처음으로 교차하는 순간에 기적이 일어난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화산재가 흩날리는 우울한 도시를 떠나 세 식구가 다시 뭉치는 '기적'을 바라는 형,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소박한 소원을 품은 친구들은 함께 돈을 모으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 어른들 몰래 기차 교차점으로 향합니다. 이 다큐멘터리처럼 담담하고 따뜻한 시선 이면에는, 상실과 단절을 겪어내는 인간의 내면에 대한 감독의 깊은 통찰이 숨어 있습니다.
마술적 리얼리즘, 비극을 수용하기 위한 아이들의 방어기제
현대 예술과 문학에서 현실의 엄밀한 법칙 속에 환상적인 요소가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기법을 흔히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릅니다. 고레에다 감독의 전작 《환상의 빛》이나 《원더풀 라이프》가 이 기법을 적극적으로 시각화했다면, 이 영화에서는 아이들이 품은 '기적에 대한 믿음(Magical thinking)' 자체가 서사를 이끄는 마술적 기제로 작용합니다.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가족의 해체는 어린아이들이 감당하기에는 인과관계를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비극입니다. 두 열차가 교차하는 순간 발산되는 에너지로 기적이 일어난다는 이 동화적이고 마술적인 설정은, 물리적으로 스펙터클한 마법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환상적인 믿음은 아이들이 세계의 비극을 스스로 수용하고 성장하기 위해 의지하는 단단한 방어기제이자, 지난한 일상을 지탱하게 만드는 내면의 마술로 훌륭하게 작동합니다.
나루세 미키오의 시선: 화목한 가족 대신 '비열하고 칠칠찮은' 소시민들
흔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롱테이크나 다다미 숏(tatami shot), 가족이라는 테마를 보고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후계자라 칭하곤 합니다. 하지만 고레에다 감독 본인은 자신이 오즈 야스지로보다는 나루세 미키오(1905-1969)의 서민극 미학에 더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감독은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비열하고, 칠칠찮은 다양한 인간 군상"에 큰 매력을 느꼈다고 합니다. 실제로 《진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속 부모들은 헌신적이고 완벽한 보호자가 아닙니다. 인디밴드를 한답시고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 삶에 지쳐 예민해진 어머니 등 철저하게 이기적이기도 한 소시민의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이처럼 가족을 무조건 따뜻하고 화목한 안식처로만 그리는 대신 "성가신 존재"이자 "이율배반적인 존재"로 파악하며, 현실적이고 복잡한 인간 군상의 역학을 스크린에 고스란히 옮겨 놓았습니다.
마치며, 기적은 결국 우리의 일상 속에 있다
소원을 빌면 모든 것이 마법처럼 제자리로 돌아갈 줄 알았던 기차의 교차점. 하지만 굉음을 내며 두 기차가 스쳐 지나가는 그 짧고 벅찬 순간, 형 코이치는 가족의 결합을 비는 대신 "세계가 조금 더 나아지기를" 바라며 한 뼘 더 자라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적이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초자연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칠칠찮은 가족과 지난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 내일을 향해 다시 묵묵히 걸어가는 태도 그 자체에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영화는 자본주의와 각박한 시스템 속에서 상실을 겪은 현대인들에게 과장된 위로나 눈물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대신 일상의 미시적인 디테일 속에서, 가족이라는 성가시지만 끊어낼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삶의 결을 바꾸며 회복해 나가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넷플릭스나 왓챠를 켜고 어떤 영화를 볼지 고민 중이시라면, 삶의 팍팍함 속에서 잠시 잊고 지냈던 내면의 다정한 기적을 일깨워줄 이 영화를 꼭 한번 시청해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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