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1. 23:25ㆍ카테고리 없음
지젝은 우리가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상품들이 투시경을 쓰고 보면 사실 거짓된 '쓰레기'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것이 정말 쓰레기인지가 아니라 그게 사실이라도 안경을 써 볼 용기가 있는지입니다.
<지젝의 기묘한 이데올로기 강의>(The Pervert's Guide to Ideology, 2012)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날선 비판으로 '21세기 가장 위험한 철학자'로도 불리는 지젝(Slavoj Žižek)의 강의를 다큐멘터리 감독 소피 파인스가 담아낸 영화입니다. 둘은 지젝의 <지젝의 기묘한 영화 강의>(2006)에서 먼저 호흡을 맞췄었고 <지젝의 기묘한 이데올로기 강의>(The Pervert's Guide to Utopias)라고 불릴만한 영화의 개봉도 곧 예정돼있다고 하죠. <이데올로기 강의>는 원제의 '변태의 이데올로기 가이드'라는 제목이 그 특징을 너무 잘 함축하고 있어요. 우선은 세계적인 석학인 지젝이 진지하고 내용이 꽉 차 있으면서도 그래서 더 웃기게도 (그의 시그니처 제스처로)자꾸 신경질적으로 그 큰 코를 만지작거리고 (타이타닉의 잭처럼)물에 꼬르륵 빠지는 연기까지 해가며 영화로 철학을 전파하는 게 괴짜스럽습니다. 이는 지젝이 원래 감독을 꿈꿨을만큼 영화에 대한 애정이 깊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철학과 대척점에 있을 것 같은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에 멀리서 돌을 던지는 데 그치지 않고 '지적인 록스타'라고도 불릴만큼 오히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동시에 전복시키고 치부를 드러내는 지젝 특유의 행동주의, 사회변화를 목표로 하는 사상과도 맞닿아있죠. 영화에서 지젝은 주변에 흔한 코카콜라나 잡지 같은 상품에서 부터 <사운드 오브 뮤직>이나 <타이타닉> 같은 순수한 뮤지컬, 로맨스 물로만 보였던 영화들 까지도 자본주의의 선전장이라고 말하며 숨겨진 메시지를 들춰냅니다.
이 영화는 제게 여러 가지 의미에서 깊은 인상으로,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10년쯤 전 전주에서 이 영화를 보고 우연히 만남 친구와 다음 영화관 까지 약 3킬로미터를 1시간 가까이 걸으며 계속해서 영화에 대한 얘기를 나눈 기억도 강하게 남습니다.
저는 언젠가 <지젝의 기묘한 이데올로기 강의>가 개봉된다면 <지젝의 기묘한 영화 강의>에 이어서 이 영화도 제대로 리뷰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종 광고 등을 제외하고도 25편 쯤이나 되는 삽입된 장편영화들 각각을 리뷰할 때 이 이데올로기 강의를 언급하기도 하겠죠. 하지만 사실 당장에는 어느새 10년도 더 된 이 영화가 잘 기억에 남지 않아요.. 그래서 일단 이 글에서는 다큐에서 제 기억에 강하게 남았던 영화들의 설명을 위주로 지젝의 간단한 메세지만 전달해보고자 합니다.
향유(enjoyment)와 단순한 쾌락(pleasurous)
그들은 살아있다 (1988): 보이지 않는 질서로서의 이념
지젝이 The Pervert's Guide to Ideology 에서 논의하는 중심 영화 중 하나 는 존 카펜터의 They Live (1988)입니다. 이 영화는 지젝의 이데올로기 탐구에 강력한 출발점이 됩니다. 이 영화는 선글라스를 발견한 방랑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선글라스를 통해 세상의 숨겨진 메시지와 진정한 본질을 볼 수 있으며, 외계 종족이 광고와 미디어에 내재된 잠재의식적 메시지를 통해 인류를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지젝은 They Live를 통해 이데올로기가 우리 현실의 구조에 깊이 내재되어 있다는 그의 개념을 설명합니다. 이 영화의 안경은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한 은유로 작용합니다. 안경을 쓴 사람은 일상 생활의 겉모습을 꿰뚫어 보고 그 아래에 있는 이데올로기적 구조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지젝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신념의 집합이 아니라 종종 의식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욕망과 행동을 형성하는 보이지 않는 질서입니다. 이 영화는 이데올로기가 우리 주변에 존재하며 소비자 선택에서 정치적 신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는 개념을 요약합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 (1965): 이념적 서사의 파괴적 힘
또 다른 놀랍지만 통찰력 있는 분석은 지젝의 사운드 오브 뮤직 (1965) 에 대한 논의에서 나옵니다 . 종종 건전한 가족 영화로 여겨지는 이 고전 뮤지컬은 지젝이 이념적 내용을 조사했습니다. 그는 표면 아래에서 영화가 특히 사랑, 가족, 권위에 대한 묘사에서 매우 구체적인 이념적 메시지를 전파한다고 주장합니다.
지젝은 이 영화의 서사가 전통적인 가족 구조의 중요성과 권위자에 대한 복종과 같은 보수적 가치의 강화로 해석될 수 있는 방법을 강조합니다. 게다가 그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서의 사랑을 묘사하는 이 영화가 실제 사회적 갈등과 이념적 갈등을 모호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도발적으로 제안합니다. 지젝은 이처럼 무해해 보이는 영화를 조사함으로써 가장 사랑받고 겉보기에 온순해 보이는 영화조차도 우리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깊은 이념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시계태엽 오렌지 (1971): 이념적 조건화의 폭력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 (1971)는 지젝이 심도 있게 탐구한 또 다른 영화로, 이를 통해 폭력 개념과 사회적 조건에서 이념의 역할을 논의합니다. 국가가 범죄자를 개혁하기 위해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는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불안하게 묘사한 것으로 유명한 이 영화는 지젝이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이념을 어떻게 강제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묘사로 분석합니다.
지젝은 이 영화가 사회가 심리적, 신체적 폭력을 결합하여 이념적 순응을 강요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을 제시한다고 주장합니다. 주인공 알렉스를 "치료"하는 데 사용된 "루도비코 테크닉"은 사회가 개인의 자율성과 자유의지를 박탈하여 개인을 정상화하려는 방식에 대한 은유입니다. 이 분석은 이념이 종종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수단으로 위장된 체계적 폭력의 한 형태로 기능하는 방식에 대한 지젝의 더 광범위한 비판과 관련이 있습니다.
죠스 (1975): 표면 아래의 이념적 괴물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 (1975)는 다큐멘터리에서 논의되는 또 다른 핵심 영화입니다. 지젝은 이 영화의 괴물 상어를 당시의 근본적인 사회적 두려움과 불안의 상징으로 해석합니다. 그는 상어가 공동체의 평화로운 표면을 파괴하고 미지의 것과 타자에 대한 두려움을 구체화하는 일종의 이념적 괴물을 나타낸다고 제안합니다.
지젝은 죠스를 통해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이런 두려움을 통제하고 관리하는지 탐구하는데, 종종 사회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파괴해야 할 괴물 같은 타자에게 두려움을 외재화하는 방식으로 이를 표현합니다. 이 영화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지젝의 견해와 일치하는데, 이데올로기가 종종 통제와 질서의 부과를 정당화하는 적이나 위협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죠스는 상어에 대한 스릴러일 뿐만 아니라 사회가 내부적 불안을 외부적 위협에 투사하여 이를 처리하는 방식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해설입니다.
택시 드라이버 (1976): 소외와 정체성의 위기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 (1976)는 지젝이 이념적 틀 안에서 소외와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탐구하는 데 사용됩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트래비스 비클이 사회에 점점 더 환멸을 느끼는 모습을 따라가는 이 영화는 지젝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체성의 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지젝은 비클이 폭력과 광기에 빠진 것이 그의 자아감을 형성하는 이념적 압력에 대한 반응으로 볼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그의 소외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이 의미 있는 사회적 역할이나 정체성에서 점점 더 단절되는 더 광범위한 사회적 불안의 증상입니다. 이 분석은 이념이 우리의 정체성 감각을 어떻게 형성하는지에 대한 지젝의 더 광범위한 연구와 연결되며, 개인이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자신에게 부과된 이념적 기대와 조화시킬 수 없을 때 종종 소외감과 절망감을 느끼게 합니다.
결론
이데올로기에 대한 변태 가이드는 이데올로기의 렌즈를 통해 영화를 읽는 방법에 대한 마스터클래스로, 시청자에게 영화가 우리 삶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적 구조를 어떻게 반영하고 형성하는지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제공합니다. 죠스와 같은 공포 고전부터 사운드 오브 뮤직 과 같은 사랑받는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화를 분석함으로써 지젝은 이데올로기가 모든 형태의 문화 생산에 만연하여 우리의 생각, 믿음, 행동에 미묘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철학과 영화의 교차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봐야 할 작품입니다. 지젝의 통찰력은 영화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영화 중 일부에 숨겨진 이념적 메시지를 드러내며, 이러한 영화에 대한 이해와 현상 유지를 강화하거나 도전하는 데 있어서 영화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도록 도전합니다. 지젝은 매력적이고 종종 도발적인 해설을 통해 우리가 영화의 표면을 넘어 우리 문화에서 작용하는 더 깊은 이념적 힘을 탐구하도록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