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필사 #1-1은 첫 번째 책, 코맥 매카시의 『패신저』에서 고른 첫 번째 대목입니다.
『패신저』(2022)는 미국 소설가 코맥 매카시(1933-2023)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연작 소설입니다.
한국에서는 영화로도 유명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5)와 『로드』(2006)의 작가로 더 익숙하죠. 매카시는 퓰리처상을 받았고, 여러 작품이 영화화되었으며, 미국 안에서는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주 언급됩니다. 물론 노벨문학상 수상 이력이 없는 외국의 ‘순수문학’ 작가가 한국에서 널리 읽히기는 쉽지 않았고, 그 역시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는 비교적 늦게 알려진 편이었습니다.
『패신저』는 매카시가 수십 년 동안 손에서 놓지 않고 다듬어 온 소설입니다.
팬들 사이에서는 “이번에는 정말 나온다”는 말만 오래 떠돌다가, 그의 말년에 이르러서야 『스텔라 마리스』와 함께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 두 권의 연작은 단순한 신작이라기보다, 매카시가 자기 문학의 마지막에 남긴 긴 질문처럼 읽힙니다.
『패신저』의 주인공은 물리학도이자 잠수부인 보비입니다. 하지만 이어서 출간된 연작 『스텔라 마리스』의 주인공이자 그의 동생인 천재 수학자 얼리샤도 이 작품의 중심에 깊게 놓여 있습니다. 얼리샤는 자신의 의식 속 인물인 ‘탈리도마이드 키드’와 대화를 나누고는 하는데, 그 장면들은 때때로 『채식주의자』의 영혜가 보여주는 불가해한 내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번에 필사한 부분은 짧은 프롤로그에 이어지는 1장의 한 대목입니다.
얼리샤가 키드와 한바탕 입씨름을 벌이고 그를 방에서 쫓아낸 뒤, 홀로 남겨져 꾼 꿈에서 오빠 보비를 떠올리는 장면이죠. 키드는 얼리샤의 내면 속 존재이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혐관’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 안에는 훨씬 더 깊은 의존과 상실의 애증이 깔려 있습니다. 바로 얼리샤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같아요.
매카시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가장 먼저 밀려오는 감각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압도적인 종말감입니다.
실제로 종말 이후의 세계를 그린 『로드』에서 이 감각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꼭 세계가 무너진 뒤가 아니어도, 매카시의 작품들에는 세상을 염세적으로 바라보는 인물들이 자주 중심에 놓입니다. 그들은 세상을 쉽게 믿지 않고, 인간을 낙관하지 않으며, 살아 있다는 사실마저 종종 견뎌야 할 일처럼 받아들입니다. 그럼에도 매카시는 그들 곁에 세상에 대해 거의 무한에 가까운 긍정을 품은 인물을 나란히 세워 두고는 합니다. 『평원의 도시들』의 빌리와 존 그래디, 『로드』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그렇죠. 한 사람은 세상의 어둠을 너무 많이 보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그 어둠 속에서도 끝내 걸어가게 만듭니다.
처음에는 『패신저』의 남매 역시 그런 구도일 줄 알았습니다.
멈추고 싶은 얼리샤와, 그녀를 세상에 남아 있게 해 줄 보비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패신저』는 그 예상보다 훨씬 더 어둡게 시작합니다. 앞선 프롤로그에서 얼리샤는 이미 목을 맨 채 발견되고, 1장 이후에 등장하는 보비 역시 그녀 못지않게 염세적인 인물처럼 보입니다. 떠나는 기차를 향해 계속 달리게 만드는 사람이 보비였다는 점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 자신 역시 온전히 세상 쪽에 서 있는 사람은 아닌 듯합니다. 이 남매는 왜 이렇게까지 세상을 비관하게 되었을까요? 다시 말해, 매카시는 왜 자신의 마지막 연작으로 이토록 염세적인 남매를 우리 앞에 남겨두었을까요?
『패신저』는 “재밌는 소설”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운 작품입니다.
사건이 시원하게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분명히 소설인데 물리학과 수학 용어들이 자비 없이 튀어나오고, 거기에 죄책감과 사랑, 죽음과 존재의 문제들이 느리게 얽혀 들어갑니다. 『패신저』 보다는 먼저 『로드』나 『모두 다 예쁜 말들』(1992), 『국경을 넘어』(1994)처럼 독자가 따라갈 길이 비교적 선명한 작품으로 그의 세계에 들어가도 좋겠습니다. 그렇게 몇 권을 지나 『패신저』에 도착한다면, 이 마지막 연작을 훨씬 깊이 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매카시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있다면, 가장 오래 남은 질문은 무엇인가요? 저는 아직까지도 그의 작품의 주인공들에 대해 읽을 때마다 “세상에 대해 그렇게 염세적이면서도 왜 계속 살아가는 걸까”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패신저』의 이번 첫 필사도 그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서울야외도서관 힙독클럽 필사 인증을 겸해 남기는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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